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이들에게 ‘당신은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하면 어떨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은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외쳐 온 진보·개혁 성향 경제학자들을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장 교수는 “그들이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창립한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이하 발전소)의 김성구 소장(한신대교수·59)은 장 교수보다 더 확고하게 그들을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 지난 16일 만난 김 소장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진보를 표방하는 연구소들이 있지만 그들의 관점은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틀 속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 경제 성격 논쟁’에서 장하준 교수 등은 김상조 한성대 교수 등이 제기한 재벌개혁 논의가 신자유주의 논리의 핵심과 닮았다고 지적했다. 재벌체제를 부수기 위해 자유시장경쟁의 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1인1표’가 아니라 ‘1원1표’인 주주자본주의의 심화를 초래하고 이는 한국 기업을 세계 금융자본의 먹잇감으로 던져준다는 것이다. 반면 김상조 교수를 비롯한 재벌개혁론자들은 ‘재벌과 대타협을 통해 소유·경영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세금을 더 받아내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장 교수 측의 주장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강고한 재벌체제를 도외시한 생각이며 재벌개혁 없이는 복지국가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김성구 한신대 교수(왼쪽)와 한형식 세미나네트워크 새움 활동가가 지난 16일 서울 사당동의 한 카페에서 최근 출범한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의 운영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발전소는 양측의 논의를 모두 비판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발전소 부소장을 맡은 ‘세미나네트워크 새움’의 활동가 한형식씨(45)는 신자유주의의 개념부터 정확히 짚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에서 이론상 말하는 이상적인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전면적인 국가개입이 있죠. 다만 민중보다는 자본, 산업자본보다는 금융자본에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개입했을 뿐입니다. 재벌을 해체하자는 국가개입을 주장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김 교수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도 그렇지만 자유시장 질서를 반독점과 부분적 복지정책 등 국가개입을 통해 유지한다는 독일형 ‘사회적 시장경제’도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넓게 보면 ‘국가개입으로 자유시장 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관점이 신자유주의라는 얘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도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독일의 높은 복지수준이 사회적 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개입의 역사적 성과라고 본다.
한 부소장은 재벌개혁론자들 사이에도 결이 다른 목소리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신자유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국민 전반이 부정적이기에 비판에 나서지만 근본적인 단절은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의 금융선진화·무역자유화·노동유연화 등은 노무현 정부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권을 잃으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집권하면 다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는 경우는 세계 각국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 부소장은 재벌개혁론자들의 논의와도 맥이 닿는 협동조합이라든지 사회적기업 논의도 국가재정으로 해야 할 일을 시민들의 연대로 해결하도록 만드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될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이런 운동들이 기반하는 ‘사회적 자본’ 담론을 만들고 유포한 주역이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인 세계은행이다. 실제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과 동시에 협동조합 운동을 일으킨 인도에서 보듯 협동조합은 소생산과 사회적 서비스만 대행했다. 국가 기간산업은 민영화만 계속됐다.
발전소는 장하준 교수 등의 주장 또한 과거 케인스주의의 재탕이라고 본다. 김 교수는 “기업의 독점 이윤을 보장해 주는 대신 노동권·고용 보장과 사회보장 확대를 얻어낸 케인스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성장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처럼 위기 시대에서는 그런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미국 금융위기 때 월가에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던 것처럼 케인스주의는 대은행과 기업들의 독점이윤 보장과 손실보전으로 국가 재정위기를 초래했다. 오늘날 케인스주의가 가능한 재정을 확보하고 있는 나라도 별로 없다.
결국 국가개입이 불가피하다면 그 국가개입을 자본과 시장에 유리한 방향이 아니라 케인스주의보다 더 진보적으로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발전소의 핵심 주장이다. 예컨대 금융자본이나 대기업이 파산할 경우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막대한 국민 세금으로 위기에 처한 대기업, 은행을 살려준 뒤 정상화되면 이를 다시 민간에 헐값에 되파는 경우는 외환위기 이래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익은 사유화되고 손실은 사회화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발전소는 손실을 재벌이나 금융자본에 최대한 넘긴 뒤 국가가 파산하는 기업과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되, 이 기업들을 공공적 성격의 기업과 금융기관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사회적 지배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은 재벌 기업에 대한 규제도 병행돼야 한다. 이는 노동정치의 복원과 대중의 경제정책 통제 강화 등 시장의 힘을 약화시키는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
주요 기업과 은행의 사회화라는 주장에 대해 ‘국유화’의 폐해를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터다. 한 부소장은 “타당한 비판이지만 나쁜 국유화, 좋은 시장의 논리는 냉전 이래로 쭉 사용돼온 흑백논리”라며 “시장경제도 끊임없이 문제점이 나타났지만 폐기하지 않고 고쳐나갔던 것처럼 국유화도 한계가 있으면 고쳐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포스트담론들이 국가개입 자체를 억압적이라며 폐기해버렸는데, 지난 150년이 넘도록 좌파들의 핵심 대안은 민중적 국가개입에 있었습니다. 민중이 통제하는 국가개입이라는 유력한 대안을 없애버리면 절대적으로 자본가 계급에게 힘이 기웁니다. 포스트담론이 신자유주의의 트로이목마라고까지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발전소는 김 소장과 한 부소장을 비롯해 제갈현숙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송유나 공공노조 활동가 등 소장학자 8명이 참여한다. 이들이 모이는 서울 합정동 사무실에서 당인리 발전소(서울화력발전소)가 보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지만, 무거운 ‘연구소’라는 이름을 떨치고 구체적 대안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한 부소장은 “그동안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는 이들이 ‘운동권 수준’이라고 폄하돼왔지만 구체적 팩트와 근거를 가지고 논쟁에 뛰어들겠다”고 말했다.
